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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여행,역사기행

방문객이 거의 없는 장항리서오충석탑

by 아야해 2013. 12. 4.

 

 

 

경주 장항리서오층석탑

 

위치 : 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사적 제 45호, 국보 제236호

 

통일신라, 8세기 초, 현재 높이 9.1m, 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좁은 공간에 알맞은 면적과 높이로 만들어져 공간 활용이 매우 효율적인 탑이다.

지대석의 공간 점유율을 최소로 하다보니 결과적으로 탑이 작아져

 완성된 부재를 쌓아 올리는 누적식 탑으로 변화함을 보여준다.

감은사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가는 대종천을 거슬러 오르면, 토함산 동쪽편 중턱 좌우에

계곡을 끼고 형성된 좁은 지역이 보이는데 이곳이 장항리절터이다.

 

절터에는 복원된 서오층석탑과 계곡에 떨어져 있다가 1966년 현재의 모습으로 포개놓은 동오층석탑,

그리고 금당터와 그 중앙에 불상이 서 있던 대좌가 남아 있다.

 먼저 다른 사찰의 경우 금당 앞면에 탑이 위치하는 데 비하여 장항리석탑은 전방의 공간이 없으므로 금당보다

약간 앞이긴 하지만 거의 금당의 좌우에 나란히 서 있는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동탑의 경우에는 탑이 서 있던 자리가 이미 사라졌으나 서탑의 경우 무너져 있던 당시의 사진을 참조하면,

기단부가 거의 남아 있으므로 현재의 위치가 원래 자리라고 인정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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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층수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경주에 남아 있는 5층석탑은 나원리석탑과 장항리석탑뿐인데, 장항리석탑은 나원리석탑에 비하여 기단이 좁고,

탑신은 둔중하기보다는 전체적으로 날렵한 상승감이 있다.

탑 지대석의 공간 점유 면적을 최소화하면서 상승감을 강조한 것이다.

지대석의 공간 점유율을 최소화한 것은 역시 전체적으로 절터가 협소하기 때문이다.

장항리석탑은 기단의 면적을 축소시킨 결과 탑신과 지붕돌 또한 작아져 이전에 석탑이 각 부분을

여러 개의 판석으로 조립·제작한 것과는 달리 탑신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씩의 돌로 제작되었다.

즉 탑 부분 부분을 결구하는 결구식 탑에서 완성된 부재를 쌓아올리는

누적식(累積式) 탑으로의 이행이 장항리석탑에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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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1㎞ 지점에 금광(金鑛)이 있어

 이곳에서 발파 작업을 위해 다이너마이트가 이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1923년 도굴꾼이 서탑의 사리장엄구와 불상 내부의 복장물(腹藏物)을 노리고,

야밤을 틈타 광산에서 쓰이던 다이너마이트로 탑과 불상을 폭파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후 약 10여 년간 불상과 탑은 그 주변에 파손되어 흩어진 채 방치되어 오다가

1932년 서탑을 복원하였으며, 파손된 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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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리석탑의 빼놓을 수 없는 큰 특징은 1층탑신에 나타나는 문 모양의

조각과 문 좌우에 서 있는 금강역사상이다.

동탑과 서탑의 크기는 거의 비슷하나 금강역사상의 조각만큼은 비교가 될 정도로 다르다.

문 조각의 중앙에는 용 얼굴의 정면 모습을 문고리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러한 형태는 장항리석탑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금강역사상은 비록 크기는 작지만 매우 정교하면서도 위엄 있는 자세로

연꽃 위에 서 있으며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있다.

 

우리나라에 나타나는 금강역사 가운데 유일하게 연꽃을 밟고 있는 금강역사일 것이다.

반면 동탑의 금강역사상은 연꽃이 아닌 암석 위에 서 있으며 조각적으로도 매우 느슨한 느낌을 주어

동일인의 조각 솜씨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동탑의 금강역사상과 매우 흡사하면서 가람배치 형식도 비슷한 예로 울산 울주에 있는

간월사지(澗月寺址)동서삼층석탑을 들 수 있다.

금강역사는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수문장(守門將)으로 탑에 새겨질 때는 사리,

즉 부처님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

 1929년 조사 당시 1층탑신에서 사리를 봉안했던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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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 조각된 인왕상

서탑 1층탑신 금강역사상 문 조각 중앙에는 용머리를 문고리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러한 형태는 장항리석탑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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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탑 1층탑신 금강역사상 연꽃이 아닌 암석 위에 서 있으며,

조각적으로도 매우 느슨한 느낌을 주어 서탑의 금강역사상과 같은

사람의 솜씨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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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리절터 석재로 조형된 연화대좌

 

일반적으로 대좌는 하대기단과 기둥역활을 하는 중대기단,상대기단으로 구성 한다.

장항리사지에 남아 있는 연화좌대는 하대기단과 상대기단이 남아 있다.

팔각의 하대기단은 지대석을 갖추고 기단 면석 8면에 연꽃형 그릇 모양 갖은 영기창을 저부조 하여

그안에 가각 동물과 신상을 조각해 놓았다. 

 

불상은 일제강점기 때 단단한 석탑이 깨져 온전 하지 못 것을 모아

복원해 경주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 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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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기단은 복련과 양련이 맞붙어 있는 양복련으로 구성 되어 있다.

복련은 커다란 연꽃에 작은 연꽃 2송이를 조각한 꽃잎이 8장을 구성 하는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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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 주차장에에서 본 장항리서오층석탑

 

평지에 조영된 다른 사찰과는 달리 산 중턱에 위치한 협소한 지역에 금당과 탑을 세우다보니

당연히 지형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석탑의 형태도 이러한 지형을 고려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장항리의 장항(獐項)은 우리말로 '노루목'이라는 뜻이다.

오래 전부터 토함산의 깊숙한 골짜기였던 이곳에 노루가 많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1932년 복원 공사에 참여했던 후지시마는 당시 인부들이

뿔이 달린 큰 노루를 종종 잡아먹었음을 술회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