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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여행,역사기행

경주 삼릉코스 천년 보물들 만나 보기

by 아야해 2013. 11. 6.

 

 

 

경주 남산 삼릉코스

 

삼릉코스 문화재 답사 -둘-

 

경주시 배동

 삼릉주차장에 주차 삼릉에서 출발 경애왕릉,석조여래좌상,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삼릉계곡선각육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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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골석불좌상,설잠교 용장골 용장리 까지

천천히 둘러 보며 6시간 정도 소요.

 

 

 남산 깔딱 고개를 넘어 금오봉을 오르며 본 경주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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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 갔을까?

 

수십,수백만이 짓밟고 지나 가도 살아서 바위 밑으로 뻗어 나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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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암을 힘들게 오르는 아지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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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선암 풍경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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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정 풍경

 

통일신라시대 경주시 금오산(金鰲山:남산의 한 봉우리)의 상선암(上仙庵) 위에 있던 정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때 옥보고(玉寶庫)가

거문고를 타며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남아 있는 건물 터로 미루어 단칸 규모로 추정되며,

주변에서 통일신라시대 와편들이 발견되었다. 앞쪽에 봉생암(鳳生巖)이라고 불리는 봉우리가 있는데,

옥보고가 거문고를 연주할 때 봉황이 나와

춤추며 앉았다는 설화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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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높이는 468m로 고위산(494m)과 함께 남산을 이룬다.

타원형으로 이루어졌으며,

금거북이가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편하게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남산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위산을 포함해 부르는 남산에는 불상 118체, 96기·석등 22기·연화대 19기가 남아 있고,

절터 147곳·왕릉 13기·산성터 4곳이 있어 흔히 노천박물관이라고 불린다.

인근의 1813만 4635㎢의 지역이 1985년
사적 제311호

‘경주남산일원유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에는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통분한 김시습이 1465년(세조 11)부터 7년간 이 산의 용장사에 은거하면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집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산행은 4시간 정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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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과 망산의 유래

 

 엣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동이 터서

솟아 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 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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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보물 제186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4.42m, 기단의 너비 2.13m이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에는 여러 곳에 절터가 있고,

석축·석불·석등이 있어 승려들이 불도를 닦던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석탑은 남산의 정상 부근에 있다. 이 탑은 하층기단(基壇)을 생략하고 직접 암석에

높이 약 6cm의 굄 1단으로 상층기단 중석을 받쳤다. 중석 가운데 1면은 1석(一石),

나머지 3면은 2석씩 모두 7장의 판석(板石)으로 구성하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1개씩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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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신부(塔身部)의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1석으로 하였는데,

초층 옥신은 매우 높고 네 귀퉁이에 우주만 있으며,

2층 탑신은 급격히 줄었다.

추녀는 직선이지만 전각(轉角) 윗면에서 경쾌한 반전(反轉)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지고 3층 옥개석 꼭대기에 찰주공(擦柱孔)만 남아 있다.

이 탑은 무너졌던 것을 1922년 재건하였고,

당시의 조사 기록에 의하면 2층 옥신 윗부분에 사각형 사리공(舍利孔)이 있었으나 사리장치는 없었다고 한다.

각 부의 조화가 아름답고 경쾌한 수법을 보이며 자연과의 융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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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곡 삼층석탑과 세월을 같이한 느낌의 바위틈에 자란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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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

 

보물 제913호

높이 1.62m. 보물 제913호. 지상에서 얼마 높지 않은 암면에 새겨진 이 불상은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다.

불상의 머리모양은 나발(螺髮)이고, 육계(肉髻)의 표시는 분명하지 않다.

얼굴은 비만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볼을 두껍게 하고 턱에 군살을 묘사하는 등 비교적 풍만한 편이다.

입은 꽉 다물어 입 양끝이 쑥 들어갔으며 코는 크고 긴 편인데 코에서 계속 올라가 반달같이 휘어진 선이 눈썹을 이루고 있다.

눈은 바로 뜬 편인데 눈썹과 더불어 음각선으로 길게 묘사하고 있지만,

눈을 약간 둥글게 표현하였으므로 볼록한 볼과 입 양끝의 보조개 같은

묘사와 함께 얼굴 전체를 미소짓게 하고 있다.

목은 삼도(三道)가 있지만 밭은 편이고 어깨는 둥글면서도 활기차며 가슴은 당당하면서도

힘을 느끼게 하고 있어서 전신에서 긴장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어 손끝을 아래로 내렸으며,

왼손은 다리 위에 올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오른쪽 발만 보이는

길상좌(吉祥坐 : 왼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은 다음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에 놓음)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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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통견의(通肩衣)로서 매우 얇게 빚은 듯한 의습인데,

옷주름선들을 일정하게 평행시킨 평행밀집의 옷주름이다.

이런 의문은 9세기 후기 불상에 흔히 나타나고 있지만, 9세기의 도식적인 의문과는 달리 세련되고 유려하다.

착의법은 통견으로 걸친 대의가 가슴 중심을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가슴 아래로

내려진 옷깃에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진 옷자락이 일단 들어갔다가

다시 옷깃 위로 올라와 팔목 뒤로 돌아가고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각각 두 줄의 음각선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외광은 보이지 않는다.

대좌는 무릎 밑에다 위로 향한 연화문을 길게 새기고 있다.

중앙에 있는 연화문은 제일 크고 바로 세웠으며,

좌우의 것들은 뿌리를 모두 중심으로 향하게 하여 기교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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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곡석불좌상

 

보물187호

총높이 4.56m, 불상높이 1.41m.

남산의 능선을 따라 형성된 용장사지 빈 터의 삼층석탑형 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는데 머리 부분은 없어졌다.

1923년 봄 대좌에서 굴러 떨어진 것을 복구하였다고 하며,

9년 뒤인 1932년 다시 도괴된 것을 그 해 11월 제자리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 때 벌써 목이 부러져 있고 3층 대좌가 거꾸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한 번 더 도괴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머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승형(僧形)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고,

≪삼국유사≫ 현유가조(賢瑜伽條)에 기록된 용장사의

보살형 미륵상인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후자의 설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때인 8세기 중엽의 불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머리 부분이 없으므로 불상의 이름과 양식을 분명히 알 수 없다.

목 아래 부분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고, 불상이 직접 앉혀 있는 상대석(上臺石)과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어깨는 좁은 편이지만 당당함을 보여 주고 있으며, 몸의 굴곡은 세세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균형 잡힌 신체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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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곡석불좌상 정면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結跏趺坐)이며 수인(手印)은 특이하게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을 왼쪽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놓아, 언뜻 보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좌우로 바꾸어 놓은 듯한 모양이다.

이러한 사실적인 체구의 표현은 석굴암의 감실상(龕室像)이나 8세기 중엽 불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옷은 통견의(通肩衣)이며, 옷자락 선은 조각도로 약간씩 빚은 것처럼 처리하여

자연스러운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가슴에는 승각기(僧脚岐)의 깃이 굵게 표현되어 있고 이것을 묶는 띠 매듭까지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백률사금동약사불입상(柏栗寺金銅藥師佛立像)·

경주남산칠불암사면불상(慶州南山七佛庵四面佛像)의 것과 유사하다.

왼쪽 어깨에도 또 하나의 띠 매듭이 있는데, 이것은 가사(袈裟)를 묶는 띠로서

어깨 뒤쪽의 고리에서 어깨로 내려와 무릎 아래까지 이어져 있고, 그 끝은 수술로 장식되어 있다.

이 가사 띠는 대개 승려의 초상화에 표현되는 것으로,

경주 남산 삼릉계(三陵溪)의 목 없는 불상 등 드물게 불상에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석굴암 감실의 지장보살상 같은 승려형의 상에 주로 표현된 특징적인 띠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옷자락이 대좌를 덮어 내린 상현좌(裳懸座)는 앞과 양옆에만 상현이고 뒤쪽에는 연화문을 표현하였다.

상현 주름은 복잡하지만 명쾌하게 처리되었으며, 연화문 역시 깔끔한 모양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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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곡석불좌상 측면

 

3층으로 구성된 대좌(臺座)는 기단부가 자연석이고,

간석(竿石)과 대좌가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 모양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모두 특이한 형태의 둥근 모습을 하고 있다.

석굴암 감실상들과 친연성(親緣性)이 강한 조각으로, 간명하며

세련되고 긴장감 넘치는 사실주의적 양식을 실감 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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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곡석불좌상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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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들판 풍경

 

금송정터 바둑바위에 본 항금들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