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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여행,역사기행

부산 근교 데이트(드라이브)하기 좋은 코스 - 셋

by 아야해 2009. 12. 25.

 

 

 

부산 근교 데이트(드라이브)하기 좋은 코스 - 셋 

 

창녕 문화제 탐방 코스(당일 코스)

창녕은 제2의 경주입니다. 노천 박물관이나 다름 없지요.

 

 노포동(부산) - 화왕산 관룡사(용선대) - 술정리 동,서 삼층석탑 - 만옥정공원(진흥왕척경비,창녕 객사)

- 창녕 석빙고 -영산 석빙고 - 영산만년교 - 우포늪 - 부산(노포동)

08:00 청룡동(부산) 출발 ~ 홈 도착 19:00 (왕복 280km)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昌寧述亭里東三層石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5.75m이며,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이다.
지대석과 하층기단 면석을 1석으로 하고, 하층 기단 갑석(),

상층 기단 면석과 갑석은 모두 별석으로 하되 각부를 수 매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석이며, 옥개석 받침은 각층 5단이고 상륜부는 전부 없어졌다.

세부양식에서 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랐으며 작풍이 장중 명쾌하고 기품이 있다.

이 탑을 동탑이라 한 것은 한 사역 내에 쌍탑이 건립되어서가 아니라,

같은 술정리 2km 떨어진 서쪽에 또 하나의 3층 석탑이 있기 때문이다.

 

본시 민가의 담 밑에 하층 기단 일부가 들어가 있었으나 1965년 민가를 철거하여 보존조치를

취하였을 때 석탑도 해체, 수리되었다. 제3층 탑신 상면의 사각형 사리공()에서

청동() 개형용기(), 황색유리제 사리병, 향편(), 작은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역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탑이다.-네이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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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제34호 동탑 관리소 모습 입니다.

정말 모양새가 아닌 것 같아요. 현장 주차장,울타리 등 관리가 정말 안타까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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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척경비앞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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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33호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본래 이 비석은 목마산성(牧馬山城) 서쪽 기슭에 있었는데, 1914년 일본인에 의해 발견되었고,

192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巡狩: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어 하주(下州)로 바뀌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 비는 삼국시대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이 세운 기념비로,

북한산(北漢山)·황초령(黃草領)·마운령(摩雲嶺) 비석과는

달리 비문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명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拓境碑)라고 일컬었으나,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순수비(巡狩碑-돌아다니며 순시함)에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지식리더 진순덕님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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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적성비(丹陽 赤城碑)와 비석의 성격이나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비문의 전반부는 대체로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나,

첫머리의 '신사년('辛巳年)' 이라는 글자를 통하여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어,

앞의 3기의 순수비보다 수년 앞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중국의 육조풍(六朝風) 해서체(楷書體)로 각 행마다 27~18자씩 모두 27행 643자이다.

이 중에서 현재 4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비문의 후반부는 명확하게 판독되는데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을

중앙 행정관·지방군정관(地方軍政官)·지방행정관·시종(侍從)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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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천삼층석탑 [兎川三層石塔]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72m로 원래 토천리 398번지에 있었는데

1969년 10월에 해체·수리하여 현재의 만옥정공 원내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일반형 석탑으로

상륜부()는 없어지고 상층기단() 갑석()

일부가 부서져 없어졌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양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고,

탑신 각면에는 양우주만 새겨졌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옥개()받침은 4단으로 되었다.
전체적인 조성 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네이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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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객사 [昌寧客舍]

 

1983년 8월 12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창건연대와 본래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주사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창녕현을 방문하는 관원과 손님들의 접대장소로 사용하던 관아 부속건물이다.
1924년 12월 군수 이장희가 시장 이설계획에 따라 시장용 건물로 쓰기 위해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5월 이곳 만옥정으로 이전하여 보수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주두()와 익공()을 일부 사용한 익공계 건물이다.

두 측면의 박공을 받치는 기둥열에 2개의 고주()를 사용하는

2고주 5량집이면서도 내부에는 고주를 사용하지 않고 전면에만 2개의 평주()를 두었다.

 

그 위에 다시 동자기둥을 세우고 도리 방향으로 심벽을 두어 주빈석을 마련하였다.
전면을 제외한 3면 외측 기둥 중간에 중방()을 설치하였고 발이나 병풍을 걸기 쉽게 만들었다.

높이 2.85m, 둘레 1.5m의 나무기둥 14개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용마루서까래,

이음부분 등 건물 전체에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여러 번의 보수로 원형만 보존되어 있으나 300∼400년 전 건축물의 특징을 보여준다. -네이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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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석빙고 [昌寧石氷庫]

보물 제310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10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석제로 빙실()의 크기는 길이 11m, 폭 3.6m, 높이 3.7m이다.

창녕군 교육청 바로 앞 개천 건너편에 언덕처럼 보이는 축조물이 곧 석빙고인데

봉토도 거의 완전하여 겉모양은 큰 고분처럼 보인다.

 

표면의 높이는 5.4m, 전체 길이는 13m이다.

빙실의 입구는 남쪽에 설치하였는데 좌우에 장대석()을 3단씩 쌓아서 벽을 축조하고

그 위에 1매의 장대석을 놓아 미석()을 삼았으므로 입구는 방형을 이루고 있다.

내부는 연석()으로 4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 사이에는

장대석을 옆으로 건너질러 쌓아올려서 천장을 구성하였으며,

그 사이의 천장에는 외부로 통하는 환기공이 설치되었다.
이 석빙고는 내·외 각부 구조가 경주나 안동의 석빙고와 동일한데 그 규모는 약간 작다.

석빙고 남쪽에 석비 1기가 유존하는데,

이 비문에 보면 당시의 현감() 신후서() 등이

1742년(영조 18) 2월 초하루에 역사를 시작하여 그 해 4월에 끝마쳤다고 되어 있다. -네이버백과사전-

 

동네 마당 앞에 허술하기 짝이 없게 관리되고 있는 보물들 아 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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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석빙고 [靈山石氷庫]

사적 제169호

 

1969년 2월 28일 사적 제169호로 지정되었다. 문쪽이 높고 그 반대쪽이 낮은 봉분형이다.

봉토 주변에는 자연석을 쌓아 둘레돌[]을 돌렸고 봉토 정상에는 두 곳에 구멍이 있는데 배기공()인 듯하다.

문은 지표()에서 한 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게 된 석계() 끝에 있으며

옹벽()은 큼직한 돌 세 벌을 쌓아 주변을 정리하였다.

거칠게 다듬은 거대한 돌로 벽을 쌓고 세 틀의 홍예를 바깥쪽으로 내어

판석을 덮어 공간을 차단하였고 앞뒤 벽은 그에 따라 축조되었다.

현감() 윤이일()이 창축하였다고 한다. -네이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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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은 정말 사적들이 많은 곳 인데 너무나도 허술 하게 관리되고 있는

느낌이라 안타깝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보물들에 비해 우포늪 같은 곳은 새 단장되어 차별화된

느낌이 무엇을 어떻게 후손에게 보여 주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