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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여행,역사기행

땀 흘리는 표충비

by 아야해 2013. 11. 20.

 

 

 

표충비[表忠碑]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
지정번호 : 경남유형문화재 제15호
지정연도 : 1972년 2월 12일
소재지 :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2
시대 : 조선시대
크기 : 높이 약 4m, 너비 약 1m, 두께 54.5cm
분류 : 석비

일명 사명대사비라 부른다.

 

비신(碑身)과 화강암의 비개(碑蓋)를 갖추었고,

경주석재인 빗돌은 까만 대리석이며 좌대석(座臺石)과 이수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뒷면에는 휴정(休靜)의 행장(行狀)이 새겨져 있고 측면에는 밀양 표충사에 대한 내력,

그리고 기허(驥虛)대사의 비명이 명시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영중추부사 이의현이, 글씨는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이 쓰고 판중추부사 유척기가 전서하였다.

이 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국가적으로 큰 사건이 있을 때를

전후하여 비석면에 땀방울이 맺히기 때문이다.

마치 구슬처럼 흐르는데 이것을 두고 밀양 시민들은 나라와 겨레를 존중하고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검이라 하여 신성시한다.

그래서 ‘땀흘리는 표충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때로는 비석의 4면에서 여름날 농부의 이마에서 흐르는 구슬땀처럼

맺혀 몇 시간씩 계속해서 흐르다가 그치기도 하는데,

이상한 것은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 조대에서는 물기가 전혀 비치지 않는다.

이 신기한 현상을 기후 변화에 따른 외기 현상이나 비석 자체의 결로현상으로 보는 등 과학적인 해명을 하고 있다.

 

 

삼비문

표충비 들어 가는 입구의 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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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비문을 드어서면 보이는 풍경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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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무안리 향나무 

 

1992년 10월 21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었다.

1738년(영조 14)
유정(惟政:泗溟大師)의 법손 남붕선사(南鵬禪師)가

대사의 충훈(忠勳)을 기리기 위해 밀양 영취산에 이전부터 세워져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다시 크게 짓고,

1742년에는 거기에서 동쪽 10리 떨어진 곳에 이를 알리는 비석비각,

표충비(경남유형문화재 15)를 건립하였는데,

이것을 기념하여 비각 옆에 심은 향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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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비각

 

임진왜란 때 승려로서 국난을 극복한 사명당(1544~1610) 충의의

 높은 뜻을새긴 것으로 으로 영조 18년(1742)에 대사의 5대법손 남붕(南鵬)이 건립한 것이다.

전면에는 송운대사의행적을

면에는 스승인이신 청허당 서산대사의 공덕과 기허대사의 사적을

측면에는 표충비 사적기를 각각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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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비를

일본인들이 사명대사의 혈맥을 끊기 위해 비석 옆에다 창고를 세우던 날이었다.
비석은 마치 살아있는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동안 못 견딜 정도로 몸부리치니 비석 몸체에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형상으로 「확」금이 갔다.

 일본 사람들이 표충비를 무서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용맹스런 승장의 비라는 점도 없지 않으나

마치 스님의 구국혼이 비석에 어린 듯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면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진 것이다.


예전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을 지나던 한 아낙은 매서운 겨울 날씨인데도

비석몸체에서 땀이 흐르듯 물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아낙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 역시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 아니다 싶어 관가로 달려가 고했다.
당시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郡誌)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 · I5해방, 6·25동란, 4 ·19학생의거, 5· 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 ·16 혁명 때는 5일간에 5말 7되를 흘렸다.
군(郡)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 ·25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3말 8되나 홀렸다.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소문이 동네에 나돌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아무래도 무슨 변이 있을 조짐인 듯하다며 양식이며 비상약품 등을 준비했지요.』
6·25무렵을 회고하는 주민 이씨의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땀 흘리는 비석의 영험을 믿으며

크고 작은 일에 조심하고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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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비각 땀흘린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