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들이,여행,역사기행

밀양 무안 사명대사유적지

by 아야해 2013. 11. 18.

 

 

 

사명대사유적지

 

위치 ;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기 399,400

 

사명대사생가지와 인접해 있으며 2006년도에 개관 하였다고 합니다.

유적지내에는 사명대사 가사장삼 등 복제품 65점과 평양성탈환 디오라마,

영상실,정보검색실 등이설치 되어 있습니다.

그 밖에 충의문,원형광장,사명대사동상등이 있습니다.

명장을 낳을 것을 예언한 명산이 있는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의승장((義僧將)으로서

국난극복에 많은 공훈을 세운 명대사의 생가터이다.

마을 뒷산 서쪽 기슭에 명대사의 조부모(祖父母)와 부모의 묘소가 있다.

전해오는 풍수설에 의하면 조부모와 부모의 묘소는 목마른 용이 물을 먹는 형상이라 한다.

 

 

규모는 넓은 광장이 무척 크고 아름다웠으나

방문 고객이 거의 없는 아주 조용한 분위기 였습니다.

 

사명대사유적지 들어 가기 잔 풍경 입니다. 

우측이 입구 입니다.

 

 '

'

'

들어 가는 입구 풍경

 

 '

'

'

'

 '

'

'

원형광장의 조형물이 주는 느낌이 저는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드라구요.

 

 '

'

'

'

'

'

'

원형광장의 원형조형물에는 평양성 탈환과 일대기가 표현 되어 있습니다.

 

 '

'

'

다른 한쪽의 조형물은 일본으로 건너 가는 모습과 기타 모습들 입니다.

 

 '

'

'

유적지박물관 입니다.

 

 '

'

'

사명대사 동상은 박물관 뒤쪽에 있습니다.

건물 앞쪽넓은 광장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

'

'

인자하고 위엄이 있는 모습을 느꼈습니다.

 

 '

'

'

사명대사 추모시

 

 '

'

'

원형광장 조형물 뒤편에는 일지 일부들이 새겨져

사명대사의 그당시 시간들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습니다.

 

 '

'

'

'

 '

'

'

'

'

'

'

박물관 내부 들어서면 만나는 내부풍경 입니다.

사명대사의 입적 모습이 보이며 일대기가 벽면에 해설 되어 있습니다.

 

'

'

'

사명대사의 선과급제 내용 설명..

 

 '

'

'

이글은 자수 스님 무경집 내역 자료 입니다.

 

무경집無竟集』은 조선 중기 때 스님인 무경 자수無竟子秀의 문집에서..

『무경집』은 다양한 한시 형식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유․불․선의 본질과 관계성에 대한 학문적 견해를 논의한 논설이 주목되는 시문집이다.

『무경실중어록』은 기존 선어록의 양식과 성격을 유지하면서

선종의 주요 논제와 화두를 대상으로 하여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불조진심선격초』는 불교를 중심에 두고 다른 사상을 회통하려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선종의 종지를 계승하면서도 독창적인 설명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시비설(是非說)」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옳다 그르다고들 말하지만,

실제는 표준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과연 어떠한 것이 옳고,

어떠한 것이 그른 것이냐를 논리적으로 추궁하고 있다.

「성정설(性情說)」에서는 이치에 따라서 성리를 다하는 사람은 성인이요,

욕심에 따라 정을 방자하게 쓰는 사람을 중인(衆人)이라고 한 뒤,

맹자(孟子)가 주창한 욕심을 막고 성리에 따르라는 교훈과,

감성을 억제하여 천리(天理)의 성품을 회복하라고 한 학설을 소개하였다.

「삼교설(三敎說)」에서는 유교·불교·도교가 교는 셋이지만

이치는 하나임을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

'

'

사명대사 친필

 

 '

'

'

사명대사 교지 입니다.

 

 '

'

'

전쟁 당시 깃발 입니다.

 

 '

'

'

청동함은향완(모조품)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함은향완(국보제75호)이 진품

 

높이 27.5㎝, 입지름 26.1㎝. 국보 제75호. 향로의 기면에 문양을 오목새김하고

그 오목새김된 홈 속에 은사(銀絲)를 메워넣어 장식하는 은입사향완은

고려시대에 상당히 많이 제작된다. 이 향완은 고려적으로 세련된 은입사향완의 일례로서 1957년에 발견되었다.

넓은 전의 뒷면에는 57자의 은입사 명문이 있는데,

명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1177년(명종 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에 있는 대정4년명(大定四年銘) 백월암(白月庵) 향완에 이어 국내에 유존하는 향완으로서는

최고(最古)의 예로서 편년자료의 구실을 하는 향완이다.

 

 '

'

'

사명대사가 입던 장삼 이라고 합니다.

 

'

'

'

수저와 금강저

수저가 에전에는 엄청 커서 요즈음은 못들고 먹을 것 같죠.

우측은 표충사비 탁본 입니다.

 

금강저는

내 속에 있는 마구니를 물리친다고하여,정토종이나 밀교에서 수행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

'

'

임진왜란시 의병들이 사용 하던 무기들 입니다.

 

 '

'

'

조총의 모양 입니다.

 

'

'

'

평양성 탈환의 당시 모습 .

 

 '

'

'

'

 '

'

'

사명대사 일본행적 경유도

 

사명당 송운은 1604년 말 교토에 도착하여 다음해 봄 도꾸가와 이에야스와

후시마성에서 평화회담을 가졌다.

이때 이에야스는 자기는 임진란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앞으로 두나라의 화호(和好)를 하였으므로 사명당도 이에 동의 하면서

전쟁 동안 무고히 붙잡혀 간 백성들을 송환 해 줄 것을 요구 하였다.

이 평화회담은 조선통신사의길을 열어 260년간 양국간의 평화시대를 여는 물고를 텃다.

 

 '

'

'

사명대사의 사적지

 

보현사(수충사),평양(평양성탈환),건본사사적비,월정사(평창),봉은사(서울)'

직지사(김천).해인사(합천),해인사홍재암(합천),표충사(밀양),표충비각(밀양)

 

 

 

사명대사유적지를 다녀 오며 많은 돈을 쓰며 만든 유적지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거의 모조품 일색이며 많은 역사 탐방 방문객에게 실망을 줄 것 같았습니다.

관리하는 지자체 관심과 더 많은 배려가 필요 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