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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여행,역사기행

부산 근교 데이트(드라이브)하기 좋은 코스 - 둘

by 아야해 2009. 12. 11.

부산 근교 데이트(드라이브)하기 좋은 코스 - 둘

 

울산암각화전사관,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각석,울산대곡박물관,청도 운문사 코스

노포동- 언양 IC - 울산암각화 전시관 - 반구대 암각화 - 천전리 각석 - 울산대곡박물관 - 청도 운문사

10:00 출발 ~ 17:00 도착(왕복 160 km 정도 거리)

 

운 문 사

 이 곳은 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인 세속오계를 전한 원광국사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선사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도량이다.
지금은 260여명의 학승들이 4년간 경학을 공 부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교육기관이 자리한 사찰이다.
사찰 주위에는 사리암, 내원암, 북대암, 청신암 등 4개의 암자와 울창한 소나무, 전나무 숲이 이곳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오른쪽으로 가야 합니다.

 

겨울의 문턱이라 스산 하네요.. 따뜻한 봄날 왼쪽의 벚꽃이 피고 화단에 꽃이 피면 걸음 거리가 가벼울텐데...

 

운문사 안내도 

반사가 심해 내용을 잘 못 찍었어요..

 

호 거 산 운 문 사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神僧)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4 원광서학(圓光西學) 및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관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적기 寺蹟記〉에 따르면 고려시대인 937년(태조 20) 중국 당(唐)나라에서 법을 전수받고 돌아온 보양국사(寶壤國師)가 까치떼의 도움으로

이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했으나, 943년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보양국사가 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많은 전답과 함께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105년(숙종 10)에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한 이후로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690년(숙종 16) 설송(雪松)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萬歲樓)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

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

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브리태니카-

운문사에는 일주문이 없어요...

이 곳은 범종루 입니다.

 

 운문사 처진소나무 

운문사의 처진소나무는 천연기념물 180호(1966.08.25 지정)인 노거수입니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운문사의 앞뜰에서 자라고 있으며 높이는 6m, 둘레는 2.9m입니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한때 반송(盤松:키가 작고 밑동부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소나무)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이 나무는 2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봅니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전형적인 처진 소나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신축 운문사 대웅보전 

1994년에 신축된 대웅보전입니다. 운문사에는 숙종때 지어진 대웅보전과 2곳의 대웅보전이 있어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전불로 모신 본당을 대웅전 혹은 대웅보전이라고 한다는데 ..

옛 대웅보전의 현판의 이름을 비로전으로 바꿔 달았다고 합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을 마침내 비로전으로 바로 잡은 것이지요.

그런데 문화재청이 옛 대웅보전이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라는 이유로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지만 비로자나불의

제작  연대가 대웅보전보다 앞선다는 증거가 없으니 이름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해 대웅보전이 두 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생이 느끼기엔 좀....이해가....

 

운문사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신 곳으로 응진이란 ‘존경받을 만하다’, ‘공양받을 만하다’라는 의미이다. 또한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하여

석가모니불의 직제자 가운데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16나한이나 경전결집에 참여했던 500나한을 모시기도 한다.

16나한의 각 명호는 빈도라발라사, 가낙가벌차, 가낙가발리타사, 소빈타, 낙거라, 발타라, 가리가, 벌사라불다라, 술박가, 반탁가, 라호다, 나가서가,

인게타, 벌나바사, 아시다, 주다반탁가 등이다. 나한은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성자이므로 초자연적인 신통력과 더불어

독특한 표정과 자유스러운 자세를 갖고 있다. 또한 나한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들을 제도하라는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분들이라

민간신앙에는 무수한설화들이 등장하며 서민들의 기복신앙으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 500나한을 모신 곳으로

유명한 곳은 금산사 나한전, 옥천사 나한전, 기림사 오백나한전, 송광사 나한전 등이다.

 

운문사 법륜상

범륜(梵輪)
법륜 [法輪, Dharma cakra]
범륜(梵輪)이라고도 한다. 석가가 설법하는 것을 법륜을 돌린다[轉法輪]고 한다. 법을 전륜왕(轉輪王)의 수레바퀴 모양의 고대 인도의 무기인

윤보(輪寶)에 비유한 것으로, 세속의 왕자로서의 전륜왕이 윤보를 돌려 천하를 통일하는 것과 같이, 정신계의 왕자로서의

석가는 법륜을 돌려 삼계(三界)를 구제한다. 또한 윤을 법의 뛰어난 점에 비유한 세 가지 의미로 설명한다. 그 한 가지는 원만(圓滿)의 뜻으로,

석가의 교법은 원만하여 결함이 없는 것을 윤의 원만한 모양에 비유하며, 둘째는 타파(打破)의 뜻으로, 석가의 교법은 중생의 망견(妄見)을

타파하는 것을 윤을 돌려 어떤 물건을 부숴뜨리는 것에 비유한 말이며, 셋째는 전전(展轉)의 뜻으로, 석가의 교법이 전전(轉轉)하여

어느 곳에나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이러한 법륜은 만자(卍字)와 함께 불법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불상이 조상(彫像)되기 전 조각이나 회화에서 보리수(菩提樹) ·불탑 등과 같이 부처의 형상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네이버백과사전-.

 

운문사 대웅보전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컬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은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큰 힘이 있어 마군의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부처님이 되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손 모양(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 쪽으로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으로

마군을 항복받았던 모습을 나타낸다. 협시보살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왼쪽에 모셔진 분이 문수보살로 부처님의 지혜(智慧)를 상징하는데 여의주나 칼, 청련화(靑蓮花)를 들거나 청사자를 탄 모습으로 표현된다.

또 보현보살은 오른쪽에서 부처님을 모시며 부처님의 행원을 상징한다. 흔히 연꽃을 들고 코끼리를 탄 모습으로 나타낸다.

대웅전은 법화천태종의 금당이었으나 조선후기에는 법화계통의 전통이 남아 있는 사원에서 주불전으로 사용했다.

불국사 대웅전, 통도사 대웅전, 쌍계사, 관룡사 대웅전 등 많은 걸작들이 남아 있다

 

비로전 현판이 아닌 대웅보전으로 되어 있네요.

 

대웅보전 앞 해태상

 시비·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

사자와 비슷하나 머리 가운데에 뿔이 있다고 한다. 중국 문헌인 《이물지()》에는 "동북 변방에 있는 짐승이며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대사헌의 흉배에 가식()되기도 하였고,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로 여겨 궁궐 등에 장식되기도 하였다. -네이버백과사전-

해태가 대웅 보전을 잘 지켜 주길 바래요..

 

운문사 삼층석탑

보물 제678호. 높이 540cm. 원래 기단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부 보수되었으며 특히 상층기단의 팔부중상에

새로운 석재가 첨가된 흔적이 남아 있다. 2기의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형식으로,

크기나 양식 면에서 거의 동일한 특징을 보여준다. 하대석은 지대석과 붙어 있는데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2개씩 새겨져 있고

그 위를 넓고 편평한 갑석이 덮고 있다. 상층기단에는 각 면에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팔부중상을 1구씩 조각했다.

팔부중상은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 좌우에는 천의가 날리고 있으며, 뒤에 부분적으로 보수되어

다소 어색한 느낌을 주는 상도 있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옥신석이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전체 비례로 보아 1층 옥신이 조금 높은 편이다.

옥신석에는 각 층마다 우주가 표현되어 있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처마 끝이 수평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두 탑 모두 사각형의 받침대 위에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가 놓여 있다  출처: -브리태니카-

 

삼층석탑 기단

 

운문사 작압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

작압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7호. 높이 불상 63cm, 대좌 41cm, 광배 92cm.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호분(胡粉)이 너무 두껍게 입혀져서

원래의 모습을 잘 알 수가 없다. 머리와 높다란 육계에는 나발(螺髮)이 표현되었고, 얼굴은 네모난 편으로 눈·코·입 등이 섬세하지 않고 조그마하게

처리되어 있어 부처의 위엄을 찾아볼 수 없다. 목부분은 거의 표현되지 않아 짧은 편이며 좁은 어깨에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쳤는데

옷주름선이 형식적이고, 밋밋한 가슴 위로는 승각기가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은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으나 불신(佛身)에 비해 손이 작고 조각기법이 정교하지 못해 투박한 느낌을 준다.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광배는 두광과 신광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연꽃무늬와 화염무늬가 장식적으로 얕게 새겨져 있다.

대좌는 특이한 육각형으로 상대석에는 타원형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와 하대석은 1개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특히 하대석에는

복련(覆蓮)이 돌아가면서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전반적으로 양감이 줄어들면서 평면성이 강조되어 있으며,

위축된 자세나 장식적인 광배 문양 및 대좌의 표현 등에서 시대가 다소 내려가는 통일신라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브리태니카-

 

운문사 사천왕석주

운문사사천왕석주(작압전내에)

 보물 제318호. 높이 제1석주 152cm, 제2석주 164cm, 제3석주 153cm. 4개의 길다란 석주에 사천왕상을 1구씩 부조로 조각했는데 부분적으로

채색을 칠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석주는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없고 그 용도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각 상의 이름을 밝히기가 어렵다.

그러나 손에 들고 있는 지물에 의해 대체로 삼고저(三鈷杵)를 쥐고 있는 제1석주의 사천왕상은 남방의 증장천(增長天)으로 생각되며,

제2석주는 탑을 든 북방의 다문천상(多聞天像), 제3석주는 불꽃[火峰] 또는 꽃가지를 든 서방의 광목천상(廣目天像),

제4석주는 양손으로 칼을 받치고 있는 동방의 지국천상(持國天像)으로 추정된다. 이 사천왕상은 모두 원형의 두광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무인형(武人形)으로 악귀를 밟고 천의자락을 날리면서 서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또한 신체는 장대하지만 대체로 조각적인 양감이 줄어들었고, 서 있는 다리의 자세가 엉거주춤하며 갑옷의 띠주름이 굵어지고 세부표현이

정교하지 못한 점 등은 9세기경의 통일신라 석탑이나 부도에 새겨진 사천왕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

                                                                                                            bosar님의 사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