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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여행,역사기행

부산 근교 드라이브(데이트)하기 좋은 코스 -포항-

by 아야해 2010. 3. 7.

부산 근교 드라이브(데이트)하기 좋은 코스 - 포항-

 

포항 호미곶(虎尾串), 오어사(자장암) 코스(당일)

부산 노포동 - 포항 호미곶 - 오어사(자장암)

09:30 부산 출발 - 12:30 포항 호미곶 도착 - 14:20 오어사 도착 - 16:30 오어사 출발 - 20:00 부산 도착

부산 - 호미곶(130km) -오어사(172km) - 홈 (왕복 270km 정도)

 

오어사

오어사는 『삼국유사』에도 그 이름이 나오는데, 신라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1) 때 자장 율사가 창건하여

처음에는 항사사(恒沙寺)라고 하였다. 그리고 창건이후 혜공(惠空)·원효(元曉)·자장(慈藏)·의상(義湘) 등이 주석하여

'신라 사성(四聖)'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특히 혜공과 원효 스님에 대해서는 절 이름과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옛날 오어사에서 원효 대사혜공 대사가 수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둘이서 계곡 상류에서 놀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서로 법력을 시험하여 보고자 하여, 고기를 낚아 다시 살리는 재주를 겨루었다. 그런데 둘의 실력이 막상막하여서

좀체 승부가 나지 않다가 딱 1마리 차이로 승부가 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중 고기 한 마리를 놓고 서로 자기가

살린 고기라고 주장하였다고 한 데서 '나 오(吾)'와 '고기 어(魚)'자를 써서 오어사(吾魚寺)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기를 놔준 곳이 지금 오어사 앞에 있는 오어지(吾魚池)이다. 이 이야기는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

일연 스님은 1264년에 오어사에 머문 적이 있었으므로 당시까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채록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뒤의 연혁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1995년 오어지에서 발견된 동종이 명문을 통해 고려 말인 1216년(고종 3)에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므로 이 기간에 이 같은 우수한 동종을 조성할 정도로 사세가 컸다는 것은 짐작되지만,

고려시대의 연혁에 관한 다른 문헌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조선에서는 1736년(영조 12) 화재로 전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1741년 치철(致哲) 스님 등이 대중의 힘을 모아 중건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여러 계를 조직해 사찰의 중수 및 운영에 보탬이 되도록 한 것이 눈에 띤다. 1811년 산내암자인

의상암에서 출발한 등촉계(燈燭契)를 비롯해서 1823년(순조 23) 염불계(念佛契)를 조직해 사찰을 중수하였으며,

1864년(고종 1)에도 칠성계(七星契)를 만들어 사찰 중수에 힘을 모았다. 이 같은 계의 조직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도 이어져

이 해에 나한전을 중수할 때 계가 활용되었다

 

오어사 일주문

 

오어사 편액해강 김규진님의 글 입니다

 ** 편액은 중국의 漢代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본래 고대 사찰의 처마 밑에 걸었던 글씨 또는 그림의 현판(懸板)을 그 효시로 본다.

편액(扁額)은 편액(遍額)이라 적기도 하며, 현재는 흔히 액자로 통칭하며, 액틀, 액면 또는 현판이라 칭하기도 한다.**

 

대웅전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신 주법당으로, 조선 영조 17년(1741)에 중건한 것이다. 자연석을 다듬은 5단의 석축 위에

화강석 주초를 한 겹처마 다포집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에는 칸마다 3짝씩의 백련·청련 꽃살 분합문을 달았다. 아래쪽에는 나무판에 보상화문을 그려 넣었다.

공포를 3출목으로 장식하고 연꽃무늬의 특이한 단청을 보이는가 하면 천장으로는 섬세한 양각 아래

두 마리의 학이 있어 천상세계를 짐작케 한다. 경사가 낮은 처마선에 약간의 반전()을 두어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준다.

안에 이 절의 대표적 유물인 원효대사의 삿갓이 보관되어 있다. -네이버백과사전

 

대웅전 뒷 모양 

 

범종각

기와 색상이 좀 달라요..

 

삼성각

 

응진전

 

산령각 

 

요사체

 

유물전시관

전시관 안에 동종이 있어요.

 

오어사 동종

보물 제1280호

고려 고종 3년(1216)에 주조된 신라종 형식의 전통이 엿보이는 동종이다. 1995년 11월 6일 오어지(吾魚池) 상류

준설작업 중 굴삭기 기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신라 범종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 용뉴와 음관 및 상·하대를 고루 갖추고 있으며,

당좌와 비천상·종기(鐘記)의 위치도 정연하다.

신라종에 비해 수법은 도식화하여, 상대 위로 입화식(立花飾) 연판문이 돌려져 있고, 그 아래에 보상화문으로 장식된 구연대가 있다.

천판(天板)에는 용통(甬筒:음관)을 등지고 있는 용두가 갖추어져 있다. 상대에 붙은 유곽은 당초문으로 장식하였고,

유두(乳頭)는 연꽃무늬 위에 배치하였다. 유두는 3단 3열을 갖추었으나 3곳에 5개가 결실되었다,

종신(鐘身)의 비천상 자리에는 무릎 꿇은 합장보살 1구씩이 긴 천의(天衣)자락을 위로 휘날리며 꽃방석 모양의 대좌에 앉아 있다.

보살 사이로는 6자의 범자문(梵字文)이 들어간 위패(位牌)형 명문 장식 밑에 연꽃무늬 당좌(撞座)가 놓인 장식조(裝飾組)를 각각 배치되었다.

이와 같이 당좌 위에 범자문을 새기거나 용통 상부를 여의두문(如意頭文)으로 장식한 점,

비천상이 구름 위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있는 모습 등은 신라종에서 변화를 보인 고려시대 종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용뉴의 머리쪽에 해당하는 종신부분의 왼쪽 하부, 비천상과 당좌 사이에는 7행 82자의 종기가 음각되어 있다.

이를 통해 동화사(桐華寺) 순성(淳誠)대사를 도감으로 하여 사부대중의 힘을 모아 300근의 종을 대장(大匠) 순광(順光)이

만들어 오어사(吾魚寺)에 달았으며, 그 때가 정우 4년 병자(貞祐四年丙子), 즉 고려 고종 3년 5월 19일임을 알 수 있다.

신라 동종의 주양식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조성연대가 분명하며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한 고려 동종으로서 고려시대의 공예 및 주조기술 그리고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돋을새김으로 주조된 각종 장식문양과 더불어 주성도 우수한 작품이다. -네이버백과사전-

종 전체높이 96cm, 편대폭(扁帶幅) 4.5cm, 종신높이 71.5cm, 구연대 폭 6cm, 종구의 지름 56.5cm, 당좌의 지름 12cm, 각통의 높이 17cm이다.

 

 

오어사 해후소

사용 금지 중이네요. 헌데 남,여 구분 표식이 정말 안 어울려요....

 

해후소 문고리

얼마나 많은 손이 스쳐 갔을까???

 

대웅전 문살 입니다

 

사찰의 정감 있는 모습 이런 모양은 여러 곳에서 본듯 합니다.

왜 숟가락으로

 

오어사 일주문 금강역사

 

 

경내 보수로 동자스님의 감로수가 말랐네요.

매우 심심하게 보이는 모습 입니다..

 

자장암 올라 가는 길목에 있는 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