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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여행,역사기행

부석사

by 아야해 2010. 3. 25.

 

부석사 (寺)-둘-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

 

안양문을 지나 본 안양루.지붕의 설경이 아름답다.

안양문을지나 무량수전으로 올라가 탁 트인 정경이 나를 맞는다.

저 멀리 보이는 산세와 잔설이 그 풍경의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 이었다.

 무량수전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이 안양루와 눈길을 끌었다.

이 석등은 국보 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등이 불전을 모신 곳의 바로 앞에 있는 모습은 많이 못 본듯 한데..

 

 

 

무량수전과 안양루 풍경

 

 

부석사무량수전 (浮石寺無量壽殿)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간결한 형태로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쪽은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네이버배과사전-

 

무량대수(無量大數)를 살아온 극락의 부처인 아미타불의 공간, 무량수전이다.
우리나라에 몇 개 안되는 고려시대의 목조건축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안동 봉정사 극락전의 상량문이 발견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건물로 알려졌던 건물이다.
기둥의 받침돌은 이 사찰을 처음 지었던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공포의 배치는 고려 후기에 유행했던 주심포 양식을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한국 건축사의 백미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찾아낸 미학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 주는 본보기라 할 수밖에 없다.

-자료-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중에서..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殿]

국보 제17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7호로 지정되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8각석등이다.

화강석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는 2.97m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건립된 석등의 기본양식은 하대석() 위에

간주(竿:)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상대석()을 놓아 화사석을 받치고 그 위를 옥개석()으로

덮어 평면이 팔각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 석등도 그런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8각을 기본형으로 삼고 사각형 지복석() 위에 역시 사각형의 지대석()을 얹었고,

측면에는 1면()에 2개씩의 안상()을 두었다. 간주는 8각형으로 가늘고 높은 편이며,

그 위에 앙련석()을 얹었다. 불을 켜는 부분인 화사석() 역시 8각형으로, 4

면에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화창()을 만들었고, 남은 4면에는 연대() 위에 서 있는 보살상이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도 8각이고 모서리 끝이 가볍게 솟았으며, 그 위로는 보주()가 있었는데 지금은 보주대()만 남아 있다.

비례의 조화가 아름다운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석등으로 화려하고도 단아한 걸작이며,

제작연대는 신라 중기 이후로 추정된다. -네이버백과사전-

 

 

 

무량수전 뒤편 모양.

 

 무량수전 공포

 

 

무량수전 문살

 

 

무량수전(無量壽殿) 액편

 무량수전의 액편(현판), 고려 공민왕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다

 

 무량수전 안에는 아미타여래불이 모셔져있다.
소조여래좌상 역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소조불(찰흙으로 만든 불상)이다.
불상은 건물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무량수전이 남향을 하고 있는데 비해 이 아미타불은 동향을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부석사 부석(浮石)

무량수전 뒤에는 공중에 떠 있는 돌이라는 뜻의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이는 선묘의 화신이라고 전해온다.

의상을 연모한 선묘가 의상을 보살피고 불법을 수호하는 용이 되었으며, 용이 변한 바위를 부석이라 하고,

선묘의 도움으로 세운 이 사찰을 ‘부석사’라고 하였다. 부석사에는 선묘의 영정을 모신 선묘각이 있고,

부석사 무량수전 아래 묻혀 있는 ‘석룡’을 이 절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한국의사찰-

 

 

오른쪽에 새겨져 있는데 담아오질 못 해서 스크랩

 

 

부석사 삼성각

칠성,독성,산신 세분을 한곳에 모신 전각으로

원래 "축화전"이라 불렀는데 영조때 대비의 원당으로지은건물이라고 한다.

 

삼성각 문살

 

삼성각 공포

공포[拱包]

간단히 포라고도 한다.
목조건물에서 지붕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이다. 지붕의 하중을 기둥에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주두, 소로, 첨차, 살미 등의 부재로 이루어지며, 그 종류는
다포계, 주심포계, 익공계 등으로 구분한다.

 

3층석탑에서본 아양루와 무량수전 앞마당

 

 

부석사 삼층석탑 []

보물 제249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5.26m, 기단() 너비 3.56m이다.

부석사 무량수전(殿:국보 18)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있는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으로서, 기단의 위층에 탱주(:탑의 기단 면석 사이에 세우거나 면석에

돋을새김한 기둥 모양)가 하나, 아래층에 둘인 것만 보아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지대석과 아래층 기단의 하대를 한데 붙여 8석으로 짜고 중대석 각면에는 우주(:탑 몸돌의 모서리에 세운 기둥)와 탱주가 있어

3구로 구분하였으며 갑석은 6매석이다. 위층 기단은 4매석으로 갑석을 짜고 각면에 우주를 모각하였다.

탑신()과 옥개()는 각 층마다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각층 옥신에는 우주가 있고

조각은 없으며 옥개 밑의 층급받침은 5단이다. 상륜부()는 노반(:불탑의 맨 꼭대기 지붕 바로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과 복발(:불탑의 노반 위에 있는 장식으로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만 남아 있다.
 
1960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 중앙에 얕은 사리공이 있었으나 사리 장치는 없고,

기단부에서 철제탑(), 불상 조각,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랐으나 탑신부 각부의 비례에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 둔중한 감이 있지만,

건실한 체감, 비례를 보여 장중하게 보인다. -네이버백과사전-

 

선묘각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의상이 신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게 했고, 절터까지 따라와서 절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본래 이 절터에는 사교의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의상이 이 곳에 절을 세우려고 하자 선묘가 무거운 바위를

사교의 머리 위로 띄워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무량수전 옆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선묘가 띄웠던 바위이며 아직도 떠 있다고 한다.

 

안쪽에는 1975년도에 그린 선묘 영정이 있다.

 

단하각

최근세에 건축한 정면1칸 측면1칸의 맞배집으로 응진전 뒤쪽에 잇으며

내부에는 손에 쥐를 들고있는 작은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자인당()

내부에는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3존불()로서 광배()와 좌대() 등을 지니고 있어 주목된다.

본래 이 불상들은 부석사 동쪽 약 1.5km 지점에 위치하는 동방사지()에서 옮긴 것이다.

누각 앞 쌍탑 옆에 있는 자그마한 비석에는 쌍탑을 옮긴 경위를 적고 또 자인당의 석불도 탑과 함께 옮겨왔음을 밝히고 있다.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

보물 제220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20호로 지정되었다. 자인당() 내에 있으며

3존불()로서 광배()와 좌대() 등을 지니고 있어 주목된다.

본래 이 불상들은 부석사 동쪽 약 1.5km 지점에 위치하는 동방사지()에서 옮긴 것이다.

 

이 불상의 육계(髻)는 거의 퇴화하였고 나발()만 듬성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장엄이 더욱 복잡해지고

화려한 수법은 시대의 흐름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들은 9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좌우 두 불상은 지권인()을 취하고 있어 비로자나불임을 알 수 있고

중앙의 불상은 항마촉지()의 기본형을 나타내므로 석가여래상으로 보인다. -네이버백과사전-

 

 

 

 부석사 조사당 []

국보 제19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맞배지붕 주심포계() 건물이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국사()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다.

건물은 석재()를 난적()한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중앙에 석계()를 두었다.

고려시대의 다른 건물에 비하면 기둥에 나타난 배흘림이 약화되었고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워 두공(栱  )을 받치고 있다.

주두()와 소루()에는 굽받침이 없고, 외목도리() 밑의 장설()도 단장설()이 아닌

통장설로 되어 있어 조선 전기의 주심포계 건물과 같은 점이 많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이 있으며, 좌우로는 창을 설치해 놓았다.
1916년의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으로 미루어 건립연대는 1377년(고려 우왕 3)으로 추정되며,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또한 이 건물 내부에는 보살상·사천왕상() 등이 그려진 벽화(국보 46)가 있었는데,

현재는 이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내어 안전장치를 한 후에 부석사 무량수전(無殿) 안에 보관하고 있다. -네이버백과사전-

                                                                                                                                                 이사진은 스크랩 한 것 임

 

부석사 조사당벽화 []

국보 제46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다. 모두 6폭이며, 각각의 크기는 가로 75cm, 세로 205cm이다.

원래 부석사의 창건 당시 조사당 벽면에 그려져 있던 벽화인데, 현재는 이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내어 안전장치를 한 후에 부석사 무량수전(殿) 안에 보관하고 있다.

조사당 벽면에 있던 원래의 위치 순서대로 열거하면 ①보살상(), ②다문천왕상() ③광목천왕상(),

④증장천왕상(), ⑤지국천왕상(), ⑥보살상()으로 되어 있다.

이들 벽화는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 금색, 녹색, 백색 등으로 짙게 채색하였다.

양 보살상은 풍만하면서도 우아한 귀부인상으로 정적이고도 유려한 선()을 잘 구사하여 그렸다.

또한 가운데의 사천왕상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모습으로, 힘차고 동적인 먹선으로 윤곽을 그렸고 그 안에 채색을 하였다.

1916년의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으로 미루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이 밝혀졌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벽화는

이 조사당벽화를 비롯해서 개성 수락암동() 고분벽화, 개풍군 공민왕릉() 벽화 등이 있으나

예술적 가치나 보존 상태로 보아 이 벽화가 가장 뛰어나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남아 있는 벽화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그 의의가 크다.-네이버백과사전-
                                                             스크랩 사진

 

 

응진전

무량수전 북편 위쪽에 떨어져 있으며 자인당과 함께 나란히 남쪽을 향하고 있다.

 

응진전 내부에는 석고로 만든 석가삼존불과 고졸한 16나한상이 있다.